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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약]

5화 달라진 선배

가(21)

줄 간격(1.8)

자간(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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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현석 선배 많이 달라지지 않았어?”

 

“그러게 말야. 사람이 확 변한 거 같아…….”

 

현석이 부상으로 빠진 동엽을 대신해 주전 유격수를 맡은 이래, 강릉 레빗스 2군팀 선수들은 잡담을 나눌 때마다 현석의 변모를 화두에 올렸다. 그들은 현석이 몰라보게 변했다고 여겼다.

 

예전의 현석은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팀원들과 원만한 사이였지만, 자기 의견을 꺼내길 주저할 정도로 무척 소극적이었다. 팀원들이 이야기꽃을 피울 때 잠자코 있기만 했고, 경기 중에도 벤치 구석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또한, 그는 사소한 문제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다. 공을 놓치거나 아웃당하는 등 일이 조금이라도 안 풀리면 불평을 늘어놨고, 타격 훈련 때 공이 제대로 안 맞으면 공을 던져주는 선수가 잘못 하고 있다며 성질 부리곤 했다.

 

선수들도 방출 위기에 몰리고 집안 살림이 좋지 않은 현석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그를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자꾸 짜증을 부리는 그를 부담스러워 했다. 결국 현석은 팀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겉돌았다.

 

그랬던 그가 최근들어 몰라보게 달라졌다. 훈련장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도중에 실수를 저질러도 웃어넘겼다. 그리고 짜증을 부리는 빈도가 매우 줄어들었고, 대화에 끼여들어서 자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동료들이 특히 놀라워한 건 시합날 현석의 태도 변화였다. 이전의 현석은 시합날에 무척 긴장해서 땀을 비오듯 흘렸고, 경기 내내 벤치 구석에 앉아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또, 타격에 자신감을 잃어서 볼넷이라도 따내려고 방망이를 좀처럼 휘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수비시 실책을 저질러 밉보일까 봐, 타구가 조금이라도 잡기 힘들 것 같다 싶으면 아예 잡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을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주전 유격수로 발탁된 뒤, 그는 180도 달라졌다. 벤치 한가운데서 누구보다 큰 소리로 동료들을 응원했고, 팀원이 훌륭한 활약을 보일 때마다 주먹을 휘두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일이 잘못 풀릴까봐 잔뜩 긴장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타석에서는 방망이를 적극적으로 휘두르면서도 나쁜 공을 잘 골라내어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갔다.

 

그가 쳐낸 타구는 대체로 장타로 이어졌고, 어떤 날엔 홈런 3방을 날리기도 했다. 간혹 헛스윙 삼진을 당하기도 했고, 상대 선수가 몸을 날려서 좋은 타구를 잡아내기도 했다. 예전같으면 짜증을 부렸겠지만, 이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상대방을 칭찬했다.

 

수비 역시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는 빠른 타구를 잡기 위해 몸을 던지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타구가 애매하게 떴을 때 “마이 볼! 마이 볼!”이라고 외쳐 다른 선수가 접근하지 않게 한 후 자기가 사력을 다해 잡아냈다.

 

가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싱긋 웃으며 “괜찮아! 괜찮아! 다음에 만회하면 돼!”라고 혼잣말 했다. 그리고는 다음 수비 때 허슬 플레이를 선보여, 동료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팀원들은 이렇듯 놀라보게 변한 현석을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워 했다. 2군 팀에 뛰는 선수 중 현석만큼 오래 뛴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다수는 현석을 대선배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선배가 매사를 우울하게 지내고 짜증부릴 때는 눈치 보느라 혼났는데, 이제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이고 한결 너그러워진 모습을 보이니 다행이다 싶었으리라.

 

김정수 2군 감독 역시 현석의 변모를 반가워했다. 그는 연장자에 속하는 현석이 훈련을 무척 열심히 하고 동료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며, 옆에 있던 코치에게 말했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주전 유격수에 발탁되니까 몰라보게 변했군. 계속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동엽이의 공백을 훌륭히 메울 수 있겠어.”

 

코치가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물었다.

 

“저, 감독님. 나중에 동엽이가 복귀하면 어쩌실 겁니까?”

 

“그건 왜?”

 

“둘 포지션이 똑같으니, 한 명은 벤치 멤버가 되어야지 않습니까? 현석이 이 정도로 잘해주면 벤치로 빼내기는 아까운데요. 그렇다고 동엽이를 벤치로 박아둘 수는 없고…….”

 

김정수 감독은 코치의 우려섞인 질문을 듣고 한동안 턱을 쓰다듬으며 숙고한 뒤 답했다.

 

“동엽이가 완전히 회복하여 제 실력을 발휘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동안 현석이를 써보고, 동엽이가 완전히 회복되면 둘을 경쟁 붙여야지.”

 

“하지만 보드진은 동엽이가 회복되는 대로 당장 주전으로 기용하고, 현석이를 벤치에 박아넣으라고 압박 넣을 텐데요? 감독님이 현석이에게 계속 기회를 준다면 압박이 들어올 겁니다.”

 

코치가 재차 우려를 제기하자, 김정수 감독은 정색하며 차갑게 답했다.

 

“선수 기용은 내 권한이야. 제3자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보드진이 뭐라 하든 내 뜻을 관철할 테니, 자네는 그리 알게.”

 

“아, 알겠습니다…….”

 

코치가 움찔하며 물러선 뒤, 김정수 감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읊조렸다.

 

‘마음 같아선 현석이에게 기회를 원없이 주고 싶지만, ‘6년간 보여준 게 없는 퇴물에게 무슨 기회를 또 주느냐’며 난리치겠지. 후……. 현석이가 계속 잘해주면 좋겠는데…….’

 

감독의 심정을 알아준 건지, 현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다. 4주 동안 친 홈런 개수는 11개에 달했고, 바닥을 기어가던 타율은 어느 새 리그 수위권으로 올라갔다. 강릉 레빗스 2군팀도 그의 활약에 힘입어 선두권에 올라섰다.

 

곧 방출될 예정인 퇴물로 취급받던 현석은 어느덧 2군팀의 중심 타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리더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었고, 후배들은 앞장서서 혼신의 플레이를 선보이는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현석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2군 경기장에 들어오는 관중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선수의 가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현석이 맹활약한들 알아봐주는 이는 감독과 팀동료 외엔 얼마 되지 않았다.

 

가끔 그의 활약상이 기사에 올라왔지만, “2군에서 잘해봐야 무슨 소용이냐”, “6년 동안 허송세월 해놓고 이제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2군 여포가 따로 없네” 등 가혹한 댓글만 달렸다.

 

심지어 구단도 현석을 비관적으로 바라봤다. 그가 일시적으로 잘할 뿐이고, 정식 경기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는 여론이 대세였다. 심지어 최병도 1군 감독은 아예 현석을 방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녀석, 6년간 아무것도 못한 놈이잖소! 그따위 놈에게 들어가는 급료가 아까우니, 굳이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방출하고, 다른 신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게 백배 낫소!”

 

그나마 보드진이 “위약금 주기 아까우니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 내버려두겠다”는 입장이었고, 김정수 2군 감독이 “오랫동안 팀과 함께 한 현석을 내쫓아버리면 선수들 사기가 떨어진다”며 최병도를 뜯어말린 덕분에, 실제로 방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석의 입지가 위태로운 건 변함 없었고, 이런 상태로는 1군에 승격할 가망이 없었다. 김정수는 2군에서 맹활약하는 그가 아까워서 종종 보드진에게 1군 기회를 조금이라도 주자고 권했지만, 그때마다 퇴짜를 맞았다.

 

“그 선수는 이미 기회를 받을만큼 받았습니다. 지금은 신진 선수를 기르는 게 급하지, 가망 없는 선수를 배려할 틈이 없습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 처하면 대게 절망하게 마련이지만, 현석은 오히려 개의치 않은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을 위로하는 김정수 감독 앞에서 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게 다 제가 6년간 허송세월한 탓이겠죠. 전 괜찮습니다. 끝내 여기서 기회를 잡지 못하면, 다른 팀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겠죠.”

 

이에 김정수 감독은 현석의 손을 어루만지며 격려했다.

 

“그래. 좋게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넌 지금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해주길 바란다.”

 

“예, 감독님!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감독 앞에서는 씩씩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귀가하던 중,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미리 구입한 소주병을 입에 갖다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술 맛 좋구먼! 역시 괴로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 소주가 최고지!”

 

이때 누군가가 술병을 빼앗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석 씨, 소주는 안 됩니다. 그러다 몸이 망가질 거예요.”

 

현석은 그 사람을 힐끝 쳐다보고는 냉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요즘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민정 씨 아니십니까? 누가 보면 스토커인 줄 알겠어요!”

 

“스토커라니, 말씀이 지나치군요.”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경기할 때, 집에 돌아올 때, 심지어 출근할 때 항상 저를 따라오잖아요. 이게 스토커가 아니면 뭡니까?”

 

실제로, 민정은 매일 현석을 따라가며 그의 행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현석이 훈련장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을 때 뒤따라갔고, 경기 중에는 관중석에서 “현석 선수 화이팅!”이라고 적힌 팻말을 든 채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후 마무리 훈련을 마치고 귀가할 때, 민정은 훈련장 입구에 기다리고 있다가 현석이 나오는 즉시 뒤따라갔다. 팀동료들은 그런 민정의 존재를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한 번은 한 선수가 현석에게 슬쩍 물었다.

 

“선배님, 저 여자 누굽니까? 설마 애인은 아니겠죠?”

 

현석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무슨 소리야! 내게 아내가 있는 건 너희도 잘 알잖아!”

 

그러자 다른 선수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 그럼! 혹시 불륜…….?”

 

현석은 그 말에 발끈해 버럭 화를 냈다.

 

“내가 그딴 짓을 할 놈으로 보이니? 난 아내를 배신할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다!”

 

“그럼 그 여자는 대체……?”

 

선수들이 의혹을 좀처럼 접지 않자, 현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그냥 팬이야. 그것도 극성팬. 온종일 따라다녀서 곤혹이라고.”

 

선수들은 그 말을 듣고 “아……. 그렇군요.”라며 납득해 했다. 다만 한 선수만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렇지만 팬으로 보이지는 않던데요? 선배한테 싸인해달라고 하지도 않고, 경기 중에도 팻말만 들 뿐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고, 인상도 썩 좋아보이지 않던데……. 혹시 사채에 손을 대신 건가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렇듯 현석은 민정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그녀가 자기 주위에 맴도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정은 현석의 불평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주인님의 지시를 따라 현석 씨를 곁에서 지켜볼 뿐입니다. 굳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부담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잖아요! 제겐 아내도 있는데, 당신같은 젊은 처자가 계속 따라다니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전 지시에 따를 뿐이고, 현석 씨는 제 할 일만 하면 됩니다.”

 

현석은 좀처럼 이야기가 되지 않자 신음을 흘리며 속으로 읊조렸다.

 

‘끄응……. 이야기가 통하질 않는군…….’

 

민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술병을 만지작거리는 현석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오늘 밤 9시에 주인님께서 현석 씨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오늘 밤? 그 폐가 말인가요?”

 

“네. 시각을 꼭 준수하시길 바랍니다.”

 

“저……. 안 가면 안되나요?”

 

“안됩니다.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안 오시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드리죠.”

 

현석은 자기를 냉랭한 얼굴로 대하는 민정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찾아뵙지요…….”

 

그날 밤, 현석은 옷을 갈아입고 약속장소로 향하려 했다. 이때 아내 예린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요즘 당신 이상해. 사흘에 한 번 꼴로 야밤에 어디론가 갔다오면서, 어딜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도 않잖아.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현석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이내 표정을 싹 바꾸고 그럴듯한 변명을 지어냈다.

 

“으, 응. 내일 경기에 필요한 정보를 입수해야 하거든. 상대팀에 관한 정보라서 지금 가야 해.”

 

“그걸 이 한밤중에 가서 받아낸다고? 그게 정말이야?”

 

“그, 그렇다니까! 다 먹고 사느라 하는 짓이니 그리 알고 어머니를 잘 돌보고 있어!”

 

현석이 급히 집을 뛰쳐나간 뒤, 예린은 볼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야구에 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아무도 관심없는 2군 팀의 정보를 이 한밤중에 받아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한데……?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 현석은 밤 9시에 폐가 지하에 마련된 태민의 실험실에 도착했다. 태민은 손목에 찬 시계를 슬쩍 보고는 활짝 웃으며 환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현석 선수! 약속 시각을 정확히 지키셨군요!”

 

현석은 땀을 삐질 흘리며 대꾸했다.

 

“그야, 정확히 9시에 도착하지 않으면 혼이 날 테니까요.”

 

“혼이요? 누가 말인가요?”

 

“제 눈앞에 서 있는 분이죠.”

 

“아, 저 말입니까? 하하! 제가 좀 민감하긴 하죠. 성격이 그런 거니 이해해주세요. 하하하!”

 

태민이 기분좋게 웃는 걸 보면서, 현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읊조렸다.

 

‘웃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닌데…….’

 

이윽고 웃음을 그친 태민은 현석을 부른 까닭을 설명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약을 꾸준히 복용한 현석 씨의 몸상태가 어떤지 점검하고 싶어서요. 혹시나 부작용이 발생하면 곤란하니까요.”

 

현석은 그 말에 눈썹 하나를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부작용이라고요?”

 

태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어느 약이나 과다 복용하면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하루에 한 알만 먹으면 큰 문제 없지만, 그 이상으로 복용하면 잘못될 수 있지요.”

 

“저는 하루에 한알만 먹고 있는데요?”

 

“그래도 한 번 체크하는 편이 낫습니다. 약물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석은 할 수 없이 태민의 뜻대로 하기로 하고, 신발을 벗고 간이 침대에 누웠다. 이후 태민은 온갖 의료 기기로 현석의 상태를 살폈고, 민정은 그 옆에 서서 태민이 불러주는 대로 적었다.

 

이윽고 현석의 신체 검사가 마무리되었다. 태민은 민정이 메모한 의료 기록을 쭉 살펴본 뒤,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별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는군요.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현석은 대수롭지 않는듯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답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별로 기쁘지 않나 보군요?”

 

“그야……. 선수로서 몸관리를 잘하는 건 당연하니까요.”

 

태민은 현석의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공원에서 소주를 퍼마시는 게 몸관리 잘하는 건가요?”

 

현석은 그 말에 뜨끔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민정 씨가 그걸 알려줬습니까?”

 

“민정은 제게 모든 걸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하지요.”

 

“으, 음……. 뭐, 알겠습니다. 태민 씨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니 뭐라 할 수 없겠지요.”

 

태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에 잠긴 현석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슬쩍 물었다.

 

“2군에서 맹활약하고 있던데, 1군 콜업은 언제인가요?”

 

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가망이 없어요. 아무래도 내년에 다른 팀을 알아봐야겠죠.”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다른 팀을 알아보다니요?”

 

“구단에서 6년이나 제대로 된 활약을 못한 저에게 신뢰를 거뒀습니다. 2군에서 잘하든 말든, 올해 계약이 만료되는 즉시 방출하겠다네요. 그러니 저를 콜업할 리 없지요. 그러니 2군에서 썩혀 지낼 수밖에요.”

 

태민은 현석의 설명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참 곤란하게 됐군요. 그럼 다른 팀에 가면 1군에서 뛸 수 있나요?”

 

현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아마 힘들 겁니다. 강릉 레빗스는 리그 최하위권에 속한 팀. 거기서도 1군에서 뛰지 못하는데, 다른 팀이라고 기회를 주겠습니까? 아마 2군에서 계속 뛰겠지요.”

 

“……. 그렇군요.”

 

태민은 웃음기를 싹 걷고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현석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한창 골똘히 생각하던 태민은 문득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강릉 레빗스에서 어떻게든 재기하셔야겠군요. 그 팀만이 그나마 기회가 올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요.”

 

“말했잖습니까? 가망이 없다고요! 일찌감치 퇴물로 낙인찍혔는데, 무슨 기회가 온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현석 씨.”

 

태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기회가 없다면, 만들면 되지요. 제가 손을 써보겠습니다.”

 

현석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태민 씨가 무슨 수로 기회를 만들겠어요? 약국 주인일 뿐이잖아요?”

 

“네. 겉으로 보기엔 그렇죠.”

 

현석은 태민의 대답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거, 겉으로……? 그럼 다른 배경이 있다는 건가요?”

 

태민은 손가락 하나를 까닥거리며 답했다.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알려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다 아실 테니까요. 아무튼 잠자코 기다려보십시오. 곧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현석은 태민이 영 못미더웠지만, 혹시나 싶어 동의의 뜻을 밝혔다.

 

“알겠습니다. 태민 씨에게 맡기지요.”

 

그 후 현석은 태민이 기회를 만들어주길 기다리며 2군 경기에 전념했다. 하지만 좀처럼 소식이 없자, 그는 체념했다.

 

‘그럼 그렇지……. 그 사람이 무슨 수로 기회를 만들어주겠어?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러던 어느 날, 훈련을 진두지휘하던 김정수 감독에게 한 코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김정수 감독은 코치의 귓속말을 들은 뒤,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예, 감독님.”

 

“이런 말도 안 되는……. 당장 선수들을 집합시켜!”

 

선수들은 갑작스런 훈련 중단과 집합 명령에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이지? 감독님 안색이 영 좋지 않은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나 본데?”

 

“대체 무슨 일일까? 누가 사고를 쳤다든가 같은 것이려나……?”

 

그렇게 한동안 웅성거리던 선수들은 김정수 감독이 방안에 들어서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김정수는 선수들을 둘러보더니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입을 어렵게 열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이다. 1군 팀 멤버 다섯 명이 식사 도중에 배탈이 나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구나.”

 

선수들은 그 말에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배탈? 대체 무슨 일이래?”

 

“식중독이라도 걸렸나? 다섯 명이 한꺼번에 응급실행이라니…….”

 

김정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선수들을 조용히 시킨 뒤, 말을 이어갔다.

 

그 다섯 명 전원 내야수라서, 1군으로 급히 콜업해야 한다는구나. 지금 즉시 콜업할 선수를 밝힐 테니, 앞으로 나와라. 양진태! 오대석! 이한진! 이동엽! 그리고……. 박현석! 이상 다섯 명이다.”

 

박현석은 자기 이름까지 호명되자 화들짝 놀라 재차 물었다.

 

“저, 저까지 콜업입니까?”

 

김정수 감독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너도 콜업이다. 이번 기회 잘 살리거라.”

 

“네, 네…….”

 

현석은 갑자기 찾아온 기회에 정신이 멍해졌다. 동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전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 설마……. 태민 씨가 내게 기회를 만들어주겠다는 게 바로 이걸 얘기하는 건가? 이, 이렇게까지 하다니…….’

 

그는 한동안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공포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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