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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약]

6화 실낱같은 희망

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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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5명이 식중독 증세로 병원에 실려간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후, 강릉 레빗스 구단은 급한 대로 2군에서 다섯 명을 콜업하여 빈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병원에 실려간 이들이 회복될 때까지 1군에서 뛸 예정이었다.

 

그 중에는 유격수 이동엽과 박현석도 있었다. 이동엽은 팀의 기대주이지만 발목 부상을 당한 뒤 아직 재활 중이었다. 반면 박현석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방출 예정인 퇴물 선수로 취급받았다.

 

사실 김정수 2군 감독은 동엽의 콜업을 결사 반대했다. 몸상태가 완전하지 않은 선수를 섣불리 콜업해서 썼다가는 일을 그르칠 우려가 크다는 것이었다.

 

“동엽이 발목의 붓기가 가라앉기는 했지만, 재활이 아직 끝나지 않아 제 컨디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억지로 기용하려 했다가는 큰일납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그러나 최병도 1군 감독은 김정수의 반대를 묵살했다. 구단의 기대를 듬뿍 받는 유망주를 2군에 박아두고, 퇴출 예정인 선수만 콜업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보드진이 동엽이를 중용하라고 압박 넣고 있는데, 나더러 그들에게 대들란 말이오? 끝물인 놈을 괜히 기용했다가 모가지가 날아가면 당신이 책임질 거요?”

 

“감독님! 그렇다고 해도 몸상태가 완전하지 않은 선수를 억지로 기용하는 건…….”

 

“됐소! 재활은 1군에서도 할 수 있고, 뛰다보면 컨디션을 저절로 회복하겠지. 1군 운용은 내 권한이니 더는 왈가왈부 마시오!”

 

결국 동엽은 감독의 독단으로 재활을 마치기도 전에 1군 주전 유격수로 발탁되었다. 현석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콜업되었지만, 감독으로부터 ‘끝물’로 취급되는 처지라서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현석은 오랜 만에 1군에 콜업된 이 기회를 살리려 애썼다. 가장 먼저 훈련장에 들어온 건 기본이고, 기합을 질러가며 훈련을 열심히 했다.

 

심지어 훈련이 끝난 뒤에도 체육관에 가서 어둠이 완전히 깔릴 때까지 자발적으로 몸을 단련하기도 했다. 이를 한다못한 코치가 한 소리 했다.

 

“임마! 너무 오바하지 마라. 그러다 탈나면 어쩌려고 그래?”

 

현석은 담담한 태도로 답했다.

 

“제가 물불 가릴 처지인가요?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 꼭 잡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노력해야지요.”

 

그러나 최병도 감독의 관심은 오로지 동엽에게 쏠렸다. 그는 동엽이 달리기 훈련 때 절뚝거리는 걸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지만, 경기에 출전시키겠다는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다.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아서라도 뛰라고 해! 윗선에서 녀석을 중용하라고 했단 말이다!”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였지만, 동엽은 과연 팀의 기대주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는 지끈거리는 발목의 통증을 참아가며 첫 3경기에 출전해 홈런 1방, 2루타 3개를 치는 등 맹활약했고, 수비에서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반면에, 현석은 벤치에 박혀 있을 뿐, 경기에 좀처럼 뛰지 못 했다. 그는 최병도 감독에게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지만, 감독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현석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절망감을 속으로 토로했다.

 

‘결국 여기까진가. 진작에 잘했더라면 이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 텐데……. 이것이 내 운명인가…….’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이천 라이즈와의 경기를 치르기 위한 마지막 훈련을 치르던 중, 동엽이 동료 선수가 친 타구를 잡기 위해 뛰어가다가 발목이 또다시 뒤틀리고 말았다.

 

“아악!!!”

 

동엽이 발목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하자, 한창 훈련에 열중하던 선수들은 동엽을 에워싸 걱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 후 의료진이 동엽의 상태를 체크한 뒤 감독에게 비보를 전했다.

 

“감독님! 이젠 무리입니다. 어서 동엽이를 병원에 데려거야 합니다.”

 

“붕대를 발목에 감고 가는 것도 안 되나?”

 

“발목이 돌아가버려서 그걸로는 턱도 없습니다. 얼른 데려가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끄응…….”

 

최병도 감독은 팀닥터의 부정적인 보고에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는 한동안 어찌할지 고민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지시했다.

 

“어쩔 수 없군. 동엽이를 구단 지정병원으로 보내. 오늘 경기는 다른 놈을 써야겠다.”

 

그렇게 동엽이 구급차에 태워져 병원에 실려간 뒤, 수석코치가 권유했다.

 

“현석이를 유격수로 세우는 게 어떻습니까? 그 녀석 요즘 훈련을 무척 열심히 하던데요. 기회를 한 번 주는 게 어떨까요?”

 

그러나 최병도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절했다.

 

“걘 안 돼. 윗선에서 가급적 쓰지 말라고 했단 말이다.”

 

“하, 하지만 지금 당장 유격수로 쓸 자원으로는 현석이 외엔…….”

 

“문덕이가 있잖아. 걔를 쓰면 돼.”

 

“기, 김문덕이요? 하지만 걔는 2루수인데…….”

 

코치가 어리둥절해하자, 최병도 감독은 버럭 화를 냈다.

 

“뭘 그리 따져! 2루수 바로 옆 포지션이 유격수잖나! 2루수를 볼 수 있다면 유격수도 할 수 있겠지!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결국 이날 경기에는 2루수를 맡던 김문덕이 유격수로 옮기고, 2루수엔 다른 후보 선수가 배치되었다. 현석은 또다시 벤치에 박혀 있어야 했다. 현석은 벤치 구석에서 등을 벽에 기댄 채 체념했다.

 

‘감독님은 끝내 나를 기용할 생각이 없구나. 정녕 이대로 끝인가…….’

 

하지만 경기는 최병도 감독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 포지션이 아닌 유격수를 맡았기 때문인지, 김문덕 선수는 이날 실책을 다섯 번이나 범했고 타격도 몹시 부진했다.

 

그 바람에 경기는 시종일관 불리하게 흘러갔고, 8회에 접어들 무렵 스코어는 8:4로 강릉 레빗스의 패배가 눈앞에 이르렀다.

 

이대로 패한다면, 시즌 시작 후 하위권에 처져 있던 강릉 레빗스는 꼴지로 추락할 수 있었고, 최병도 감독의 명줄도 위태로웠다.

 

“젠장……. 이 일을 어찌해야…….”

 

최병도 감독은 수염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위기를 타파할 방안을 마련하려 애썼다. 이때 옆에 있던 수석코치가 재차 권했다.

 

“감독님……. 이제는 안 됩니다. 더 늦기 전에 현석이를 기용하십시오.”

 

“현석이?”

 

“예. 문덕이는 우려대로 실책을 연이어 저질러 수비 불안을 자초했습니다. 이번 8회 초를 잘 막아야 8회 말부터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덕이가 또다시 실책을 저지른다면,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갈 우려가 있습니다.”

 

“으, 음……. 그건 그렇지만…….”

 

“상황이 이런데 더 머뭇거릴 수는 없습니다. 조속히 결단을 내리십시오.”

 

최병도는 보드진에게 ‘실패자’로 낙인찍힌 현석을 기용하는 걸 끝까지 꺼렸지만, 수석코치의 거듭된 권유에 못이겨 그를 기용하기로 했다.

 

“현석아! 글러브 챙겨라. 네가 유격수를 맡아줘야겠다.”

 

그때까지 침울하게 앉아있던 현석은 감독의 지시에 반색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예, 감독님!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현석은 곧장 유격수 자리로 가서 몸을 풀며 공이 날아오길 기다렸다.

 

‘이 기회 꼭 잡고 말겠어! 반드시……. 반드시……!’

 

얼마 후, 상대 타자가 친 야구공이 현석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현석은 즉시 몸을 던져 타구를 잡아낸 뒤, 1루를 향해 힘껏 던졌다. 공은 타자보다 먼저 1루에 도달했고, 심판은 주먹을 힘차게 휘저으며 외쳤다.

 

“아웃!”

 

현석은 유니폼에 묻은 흙을 손으로 탈탈 털며 내심 흡족했다.

 

‘몸이 몹시 가볍군. 마치 날아갈 것 같아…….’

 

얼마 후, 이번에는 타자가 친 공이 관중석 쪽으로 향했다. 선수들은 못 잡을 공이라 여겨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현석만은 끝까지 잡으려 들었다.

 

“마이 볼! 마이 볼!!!”

 

현석은 크게 외치며 관중석 쪽으로 달려들더니, 몸을 내던졌고, 주변에 있던 관중들은 갑자기 뛰어든 현석 때문에 깜짝 놀라 급히 몸을 피했다. 현석의 몸은 관중석에 완전히 넘어갔고, 선수들은 숨을 죽이며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글러브를 낀 팔이 들어올려지더니, 현석이 벌떡 일어나 글러브를 살짝 펼쳤다. 거기에는 야구공이 박혀 있었다.

 

“아웃!!!”

 

심판은 큰 소리로 콜사인을 보냈고, 잠시 멍하니 있던 관중들은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현석의 열성적인 플레이에 찬사를 보냈다. 동료들 또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현석을 칭찬했다.

 

“나이스 플레이! 나이스 플레이!!!”

 

현석은 몸을 내던진 여파로 몸 여기저기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모두에게 찬사받자 기분이 무척 좋아져서 고통을 잊었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이 맛에 야구 선수를 하는 거지…….’

 

그때까지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던 강릉 레빗스 선수들은 현석의 열성적인 수비에 전의가 급상승하여 반격하여 경기가 끝나는 9회말에 8:7까지 따라붙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역전도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이천 라이즈 측에서 마무리투수 최필한을 투입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최필한은 지난 시즌에 40세이브를 기록한 선수로, 리그 최고의 마무리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주무기는 160km에 근접한 패스트볼로, 어지간한 타자도 손을 못쓸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 이날 경기에서도 역시나 타자들이 맥을 못 쳐서, 2타자가 연이어 삼진 아웃당했다.

 

다음 타석에 설 선수는 현석. 최병도 감독은 대타를 기용하려 했다. 이때 한 사람이 감독에게 다가가 권유했다.

 

“감독님, 현석이를 한번 믿어보세요. 오늘 잘해주지 않았습니까?”

 

감독에게 감히 직언한 이 선수는 강릉 레빗스의 주전 우익수인 정대은이었다. 그는 6년전 대학을 졸업한 뒤 현석과 함께 강릉 레빗스에 입단했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고, 함께 성공하자고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렸다. 대학 야구 역대 최고의 홈런왕이었던 현석은 실패를 거듭하며 2군에 박혀 지내던 반면, 대은은 주전 우익수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대은의 입지는 강릉 레빗스에서 상당한 편이었기 때문에, 최병도 감독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대은을 살살 달래려 애썼다.

 

“대은아,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선수 기용은 내 권한이니까 이해해주렴.”

 

하지만 대은은 물러서지 않았다.

 

“딱 한 타석입니다. 한 타석! 현석이는 그 정도 기회를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것도 주지 않고 바꿔버리는 건 모욕입니다.”

 

“그, 그렇지만…….”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현석이를 한 번만 믿어보세요. 녀석은 분명 상대를 끈덕지게 물고 늘어질 겁니다.”

 

대은의 강력한 권고에, 최병도 감독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여기에 다른 선수들까지 호응했다.

 

“대은 선배 말이 맞습니다. 현석 선배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감독님! 한 타석이라도 기회를 주세요. 현석 선배가 이대로 끝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대타를 써도 공략할 가망이 낮으니, 선배에게 기회를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최병도 감독은 모두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현석이 타석에 서는 걸 허락했다. 현석은 감독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 뒤, 대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대은아, 나를 위해 나서줘서 고맙다.”

 

대은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며 대꾸했다.

 

“가서 잘하기나 해. 어렵게 잡은 기회 날리지 말고.”

 

현석은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타석에 서서 방망이를 꽉 잡았다.

 

‘당신이 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라고 해도, 난 당신을 꺾고 말겠어. 실낱같은 희망을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이윽고 최필한 선수가 힘차게 공을 뿌리고, 현석은 방망이를 힘껏 휘둘렀다. 그러나 방망이는 허공을 가르고, 야구공은 포수의 글러브에 박혔다.

 

상황을 지켜보는 강릉 레빗스 벤치에서는 탄식이 흘려나오는 반면, 이천 라이즈 측에선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현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음 투구를 기다리다, 공이 날아오자 다시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방망이는 허공을 가르고, 카운트는 2 스트라이크 노 볼이 되었다. 이제 한번 더 허공을 가른다면, 경기는 이대로 끝나버린다. 하지만 현석은 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장타를 치려고 스윙을 크게 가져가 봤는데, 역시 안 되겠군. 짧은 안타라도 노리는 게 최선이겠어…….’

 

그는 방망이를 짧게 잡고, 투수를 가만히 노려봤다. 이윽고 상대가 공을 던지자, 그는 방망이를 휘두르려 했다. 그러다 중간에 멈칫했고, 야구공은 땅바닥을 찍고 글러브에 들어갔다.

 

“볼!”

 

심판이 큰 소리로 콜 사인을 외치고, 현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읊조렸다.

 

‘유인구였군. 하마터면 속을 뻔 했어…….’

 

그 후 현석은 공이 오는 대로 모조리 쳐내서 파울로 만들고, 빠진다 싶으면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 결과, 2스트라이크 노볼이었던 카운트는 어느새 2스타리아크 3볼이 되었고, 최고의 마무리라 평가받던 최필한은 현석을 상대로 10구째 승부를 내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양측 벤치 모두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고, 관중들은 숨을 죽이며 이 치열한 접전의 결과를 손꼽아 기다렸다. 최필한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 상대에게 질렸는지 땀을 뻘뻘 흘렸지만, 현석은 의외로 여유가 느껴졌다.

 

‘난 어차피 갈 때까지 간 몸이야. 여기서 끝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어……!’

 

이윽고 최필한 선수가 12구째 공을 던지자, 현석은 방망이를 힘차게 휘둘렀다. 현석은 이번에도 파울을 칠 생각이었지만, 이번 타구는 3루수 쪽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제길, 끝인가. 그러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그는 아웃되리라 짐작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1루 베이스 쪽으로 돌진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3루수가 공을 잡아낸 뒤 1루 쪽으로 급히 던졌는데, 너무 힘껏 던진 나머지 1루수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던져버린 것이다!

 

현석은 공이 빠진 걸 확인하고 곧장 2루로 달려갔고, 수비진은 급히 공을 잡은 뒤 2루로 던졌다. 하지만 현석이 먼저 2루에 안착하여, 끝날 줄 알았던 경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후우……. 살았다…….”

 

현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주변을 둘러봤다. 관중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고, 강릉 레빗스 벤치에서도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하지만 현석은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홈에 들어가야 해. 그래야 경기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어…….’

 

현석은 2루 베이스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3루를 호시탐탐 노렸다. 기회만 되면 3루 도루를 감행해 최필한을 좀더 압박할 작정이었다.

 

최필한은 그런 그가 부담스러웠는지 2루로 공을 연이어 던졌지만, 현석은 그때마다 여유롭게 돌아간 뒤 또다시 베이스에서 멀찍이 이동하여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그 때문일까? 최필한은 제구력이 급격히 흔들리더니, 다음 타자가 볼넷으로 걸어가게 허용했다.

 

‘좋아! 일이 잘 풀리고 있어. 조금만 더 하면…….’

 

현석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홈에 들어갈 기회를 엿봤다. 그러다가 타자가 친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자, 그는 냅다 홈으로 달려갔다.

 

이때 3루 주루 코치가 멈추라는 지시를 보냈다. 타구가 살짝 빠지다 좌익수에게 잡혔기에, 홈으로 무작정 갔다가 잡힐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홈에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선 그는 그 자시를 보지 못하고 홈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그러나 상대 좌익수가 공을 잡아낸 뒤 홈으로 힘차게 던졌고, 야구공은 현석보다 홈에 먼저 도착하여 포수의 글러브에 안착했다. 현석은 포수가 공을 먼저 잡아내어 기다리는 걸 보고 눈앞이 아찔했지만, 곧 기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판사판이다! 될 대로 되라!!!’

 

현석은 홈을 향해 슬라이딩했고, 포수는 글러브로 그를 터치하려 했다. 이때 현석은 몸을 살짝 비틀며 왼팔을 슬쩍 빼 포수의 글러브를 피하고, 오른 손으로 베이스를 터치했다. 심판은 이 광경을 똑바로 목격한 뒤 양팔을 양옆으로 휘저으며 외쳤다.

 

“세잎! 세잎!!!”

 

현석은 잠시 멍하니 누워서 결과를 되새겼다.

 

‘세잎……. 동점이구나. 내가 해냈어. 해내고야 말았어…….’

 

그는 신음을 나지막하게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탈탈 털며 벤치로 돌아갔다. 동료들은 그를 껴안으며 경기가 원점이 된 것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선배님! 최고예요! 선배님 덕분에 동점이 되었다고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배!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상대팀은 이제 사기가 완전히 꺾였어요. 이게 다 선배님 덕분이에요!”

 

현석은 그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한 뒤, 최병도 감독을 돌아봤다. 감독은 마음에 찔리는 게 있는지 시선을 다른 데로 회피하며 헛기침 했다.

 

“으, 음……. 현석아, 수고 많았다.”

 

현석은 그런 감독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려요.”

 

“으, 응?”

 

“오랜 세월 모두를 실망시킨 걸 생각하면 이걸로는 턱도 없습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기에게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현석이 정중한 태도로 감사 인사를 건네자, 최병도 감독은 무척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 그래. 앞으로 잘해보자.”

 

현석은 뒤이어 다음 타석에 설 준비를 하던 대은에게 다가갔다.

 

“대은아, 이제 네 차례다. 경기를 끝내 버려.”

 

대은은 한동안 방망이를 휘두르며 아무 말 않다가 타석에 서기 전에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그렇게 하지, 친구.”

 

그 직후, 대은은 동점을 허용하여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최필한을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그리하여 이날 경기는 강릉 레빗스가 11:8의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었다.

 

경기 후 MVP는 끝내기 홈런을 친 정대은 선수가 수상했다. 하지만 그날 경기를 지켜본 모든 이는 레빗스의 승리를 이끈 주역은 따로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은 역시 이날 가진 인터뷰에서 현석을 치켜세웠다.

 

“전 그저 다된 밥을 밥그릇에 퍼 담았을 뿐입니다. 현석이가 수비를 잘해주고 상대 마무리를 상대로 분전하지 않았다면, 경기는 그대로 끝나고 제가 쓰리런 홈런을 칠 기회는 절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 경기 후, 현석을 퇴물 취급하던 시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악일 뿐”이라며 평가절하하는 이도 있었지만, 몇몇은 대학 야구 최고의 선수였던 그가 부활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이렇듯 기대와 비아냥이 오가는 상황에서, 현석은 조금씩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배후에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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