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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약]

2화 수수께끼의 광팬

가(21)

줄 간격(1.8)

자간(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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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 콜록-“

 

야구공과 방망이가 한 가득 쌓여있는 방 한구석에서, 현석은 침대에 누워서 기침 소리를 연이어 내며 몸을 떨었다. 그는 콧물을 주루룩 흘리며 연신 재채기했다.

 

그 옆에는 아내 예린이 물을 흠뻑 묻힌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정성껏 닦았다. 그녀는 얼굴을 다 닦은 뒤 한 손을 들어 현석의 이마를 짚고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아직 뜨겁네. 내일까지 갈 거 같아.”

 

현석은 아내의 말을 듣고 짜증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젠장……. 이따위 감기 때문에 연습도 제대로 못해서야…….”

 

아내는 그런 남편을 한심하는 듯 쏘아보다가 한 소리 했다.

 

“그러게 어젯밤에 나가지 말아야지! 장대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뛰쳐나갔다가 감기나 걸리고……. 쯧쯧…….”

 

현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난들 이리 될 줄 알았겠어? 방망이 좀 휘둘러보려 했던 것뿐인데……. 하여간 난 왜 이리도 운이 없는지…….”

 

예린은 신세 한탄을 하는 현석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집에서 푹 쉬고 내일 훈련장엔 나가지 마. 내가 연락할게.”

 

현석은 ‘훈련장에 나가지 마라’는 말에 발끈하여 버럭 화를 냈다.

 

“뭔 헛소리야! 이까짓 감기 때문에 팀에 나가지 말라고?”

 

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당신이 열심히 일하려는 건 알겠지만, 그 몸상태로는 무리야. 억지로 갔다가는 탈날 테니 내 말 들어.”

 

하지만 현석은 아내의 만류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럴 수는 없어! 감기 따위에 굴해서야 프로라고 할 수 있겠어? 난 죽어도 훈련장에 갈 테니까 그리 알아!”

 

예린은 고집을 부리는 현석을 딱하다는듯 바라보며 재차 만류했다.

 

“그러다가 탈 나면 어쩌려고? 그런 몸으로 가봤자 훈련에 제대로 임할 수 있겠어? 괜히 팀 동료들에게 감기나 옮기지 말고 내 말대로 푹 쉬어.”

 

현석은 쉬라고 권유하는 아내가 못마땅했는지 몸을 홱 돌려서 벽을 바라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난리야! 다시는 쉬라는 소리 하지 마!”

 

그 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예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전에 빚 어떻게 갚을 거냐고 윽박지른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 그런 거 아냐.”

 

현석이 부인했지만, 예린은 남편이 그런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는지 낯빛을 흐리며 사과했다.

 

“미안해. 당신에게 뭐라 할 일이 아니었는데……. 그때 당신이 술먹고 들어와서 주정부리니까 화가 나서 그만 못할 소리를 했어. 정말 미안해…….”

 

“그런 거 아니야. 난 그저 프로 선수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라고…….”

 

예린은 등을 돌리고 있는 현석을 눈물을 살짝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껴안았다.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당신까지 잘못되면 나와 어머님은 어떻게 살겠어?”

 

현석은 할 말을 잃었는지, 등을 돌린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몸을 감싸고 있던 아내의 팔을 풀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 게.”

 

예린은 아픈 몸으로 밖에 나가겠다는 남편의 말에 깜짝 놀라 연유를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설마 또 연습하려는 건 아니겠지?”

 

현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약국에 갈게. 해열제 좀 사야겠어.”

 

“그럼 내가 갈게. 당신은 좀더 누워 있어.”

 

“아냐. 바람 좀 쐴 겸 직접 가서 살 거야. 당신은 어머님을 잘 모시고 있어.”

 

현석은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외출복을 입은 뒤 기어이 아픈 몸을 끌고 밖에 나갔다. 그 후 집 문을 닫은 뒤,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안하긴……. 잘못은 내가 빌어야지. 곧 있으면 백수가 될 텐데 당신을 무슨 낯짝으로 마주보겠어…….”

 

하지만 현석은 무작정 집을 나선 걸 곧 후회했다. 그날 따라 봄추위가 상당해서,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데도 오한이 들 정도로 추웠다. 그는 인파 속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내 말 듣고 바깥에 꼼짝도 하지 말 걸…….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괜찮은 약국이 있는지 살펴봤다. 하지만 주변에 약국 간판들이 수없이 깔려 있는 걸 보고 난감해 했다.

 

“우리 동네에 약국이 이렇게 많았나? 어딜 들어가야……. 응?”

 

한동안 살펴보던 그는 한 곳을 보고 멈칫했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가 목격한 약국 위에는 ‘마법의 약국’이란 명칭이 적혀 있었다.

 

“마법의 약국? 무슨 생각으로 약국 이름을 저렇게 지었지? 마법과 약국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그는 창문을 통해 약국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특별한 있는 지 살펴봤다. 전열대 위에 길쭉한 모자를 쓰고 눈, 코, 입이 새겨진 호박이 있는 게 상당히 특이했지만, 그외에는 다른 약국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흠……. 그저 눈에 띄려고 이름을 저렇게 지은 걸 지도 모르지. 뭐 어때? 한번 들려봐도 손해 볼 건 없겠지…….”

 

현석은 약국 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그런데 약국은 수많은 약재와 진열대를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현석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주인을 불렀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뭐야, 손님이 왔는데 아무도 없네. 이럴 거면 애당초 문 열지도 말던가…….”

 

현석이 투덜거리며 도로 나가려 할 때, ‘제조실’이라는 명함이 적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 활짝 웃으며 양팔을 펼쳤다.

 

“어서 오십시오!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마법의 약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는 연한 회색의 두꺼운 테가 두드러진 안경을 썼고, 머리를 한쪽으로 쏠리게 빗었으며, 각진 턱에 눈썹이 두꺼웠고, 흰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현석은 낯선 이가 갑자기 나타나자 얼떨떨해 하며 답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사내는 방긋 웃으며 재차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떤 약이든 주문하시면 마법의 힘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현석은 ‘마법의 힘’ 운운하는 그를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자기가 온 목적을 솔직하게 밝혔다.

 

“해열제 좀 사려 왔는데요. 열이 좀 많이 나서요…….”

 

“아하! 해열제 말이군요. 곧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응?!”

 

만면에 미소를 짓던 사내는 문득 현석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두 눈을 번쩍 뜨고 한 손을 입으로 틀어막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 호, 혹시! 박현석 선수 아니세요? 그 강릉 레빗스에서 활동하시는…….”

 

현석은 약국 주인이 자기를 알아본 것에 깜짝 놀라며 얼떨결에 인정했다.

 

“예, 예……. 그런데요…….”

 

사내는 현석의 한 손을 붙잡고 흔들어대며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박현석 선수가 제 약국에 찾아오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저, 선수님이 대학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광팬이었어요!”

 

“네? 제 팬이시라고요?”

 

“네! 정말 영광입니다.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사내는 백지 한 장과 볼펜 한 자루를 서둘러 가지고 와서 현석에게 내밀었다.

 

“여기에 사인 좀 해주세요. 대대 손손 가보로 삼겠습니다.”

 

“저, 저기……. 전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

 

“에이, 무슨 말씀을! 어서 사인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현석은 자기를 무척 환대하는 그에게 부담을 느꼈는지, 땀을 삐질 흘리며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황.태.민.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태민씨군요. 알겠습니다…….”

 

현석은 볼펜을 들어 백지에 쓱- 쓱- 쓴 뒤 태민에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사인하긴 했습니다만……. 마음에 드십니까?”

 

태민은 양손을 모아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고마워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박현석 선수가 제게 사인을 해주시다니……. 꿈을 꾸는 것 같아요!”

 

현석은 자기에게 사인받은 걸 무척 고마워하는 것에 무안해졌는지 뒤통수를 긁으며 대꾸했다.

 

“저도 믿기지 않는군요. 저같이 한물간 놈을 아직도 응원해주시다니…….”

 

태민은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한물갔다니요? 대학 야구 역사상 최다 홈런을 기록하시고, 수비 부문 최우수상도 수상하신 분 아니십니까? 그런 분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현석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그거야 6년 전 얘기죠. 지금은 팀에서 쫓겨나기 직전까지 몰린 하찮은 선수일 뿐입니다.”

 

“네? 강릉 레빗스에서 쫓겨나신다고요? 대체 무슨……?”

 

현석은 한숨을 살짝 내쉰 뒤 자기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얼마 전에 이번 시즌 후 방출될 거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뭐, 6년이나 보여준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태민은 한동안 두 눈을 끔벅이다가 양손을 모아 사과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라서 죄송합니다. 해외에 오래도록 있다 와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대체 그 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실례가 안 된다면 말씀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그건…….”

 

현석은 그런 것까지 밝혀도 되나 걱정됐지만, 자기를 무척 좋아해주는 팬의 간절한 눈빛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죠…….”

 

그 후 두 사람은 응접실에 들어가서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태민은 이야기를 모두 듣고 커피가 담긴 종이컵에 입을 몇 차례 갖다댄 뒤, 각진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흠……. 그럼 레빗스에 입단하신 이래 6년간 2군에만 있었던 건가요?”

 

현석은 침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처음부터 2군 신세였던 건 아니었습니다. 입단 직후엔 매경기에 출전했고, 언론과 팬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았죠. 하지만 프로의 벽이 예쌍보다 높았던 건지, 대학 때와는 달리 마음대로 되는 게 없더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방망이를 있는 힘껏 휘둘렀지만 허공만 가르고 돌아가면서 관중들의 야유를 받았던 걸 떠올렸다. 뒤이어 날아오는 공을 잡지 못하여 상대를 잡지 못한 것도 떠오르자, 그는 머리를 세차게 휘저으며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래도 누구나 겪는 시행착오라고 여기고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좀 된다 싶을 때 부상당하기 일쑤였죠. 저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는 한숨을 재차 내쉰 뒤,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몇년 간 세월을 허비하니, 이제는 애물단지 취급받게 되는군요. 이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평생 야구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런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흘려 내려왔다. 그는 소매로 눈물을 닦은 뒤,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태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한 사람 뿐이라면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아내도 있고, 특히 편찮으신 어머니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 정말 막막합니다…….”

 

“아, 어머님이 계시군요?”

 

“네. 올해로 예순여덟이신데, 잔병에 자주 걸리셔서 병원에 들락날락하십니다.”

 

“저런…….”

 

현석은 문득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흐느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태민은 조용히 흐느끼는 현석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종이컵을 탁자에 놓고 묘한 말을 했다.

 

“운명이란 게 있긴 있나 봅니다. 제 약국에 박현석 선수가 찾아온 것도 그렇고, 딱 필요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진 분이 제발로 찾아오시다니…….”

 

현석은 태민의 말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눈물로 젖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태민은 현석을 날카롭게 응시하다가 말을 걸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눈 앞에 인생을 바꿀 기회가 생기면 붙잡고 싶으시죠?”

 

“그, 그거야 당연하죠…….”

 

“그 기회를 잡는 대가로 다른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해도……. 붙잡으실 건가요?”

 

현석은 태민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상대방이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는지, 다소 긴장된 얼굴로 답했다.

 

“그, 그건……. 포기하는 게 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지만 웬만해서는 기회를 잡고 싶죠.”

 

그러자 태민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한 마디 했다.

 

“그 말씀,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권했다.

 

“여기에 제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 번호로 제게 연락하십시오. 그리고 밤 9시에 제 약국에 다시 와 주십시오. 현석 씨께 드릴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석은 그 말에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중요한 이야기라고요? 그건 대체……?”

 

태민은 손가락 하나를 휘저으며 답했다.

 

“그건 그때가서 말씀드리지요. 자, 그럼 용무를 마저 해결해야겠죠? 아까 해열제 산다고 하셨죠?”

 

“예? 아, 예. 그런데요…….”

 

태민은 약품 하나를 꺼내어 현석에게 건넸다.

 

“자, 여기 있습니다. 2천원 결제 부탁드립니다.”

 

현석은 얼떨떨해 하며 5천원 지폐를 건넸다.

 

“여, 여기요…….”

 

태민은 지페를 받고 거스름돈 3천원을 주며 활짝 웃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밤 9시에 다시 오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현석은 그렇게 약국을 떠난 뒤 집으로 돌아가며 좀전의 일을 숙고했다.

 

‘중요한 이야기? 밤 9시에 약국에 다시 오라고? 지금 당장 얘기하면 안 되는 건가? 뭐…… 밑져야 본전이겠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들어나보자.”

 

그날 밤, 현석은 어둠이 깔린 시내를 허겁지겁 뛰어갔다. 그는 마법의 약국 정문에 도착한 뒤,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문은 굳건히 잠겨 있었다. 손목 시계를 확인해보니, 9시 15분이었다.

 

‘이런……. 늦어 버렸군. 그 사람은 이미 돌아갔으려나…….’

 

그는 무척 아쉬웠는지 깜깜한 약국 내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역시 나는 구제불능인가 봐……. 분명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니……. 후우…… 팔자려니 해야지…….’

 

이때,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늦으셨군요.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현석은 그 말에 뒤돌아 보니, 다름아닌 낮에 만났던 그의 광팬, 태민이었다.

 

“아, 태민씨! 아직 계셨군요!”

 

“떠날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현석은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아내가 몸도 아픈데 어딜 가냐며 막는 바람에 그만…….”

 

태민은 그런 현석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안경을 치켜세우며 한 마디 했다.

 

“처음이니 봐드리지요. 다음부터는 늦지 마시길……. 제가 이런 거에 다소 민감한 편이라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현석 씨가 왔으니 장소를 옮겨야겠군요. 절 따라오십시오.”

 

현석은 자리를 옮긴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다른 데로 간다고요? 이 약국에서 만나는 게 아니었나요?”

 

“네. 약국은 그저 태민 씨와 다시 만날 장소일 뿐이고, 목적지는 딴 곳입니다. 그럼 제 뒤를 따라오십시오.”

 

태민은 그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걸아가고, 현석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속으로 읊조렸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다른 데로 옮기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하지…….’

 

얼마 후, 태민은 거진반 허물어져가는 폐가에 멈춰 섰다. 현석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기……. 정말 여기서 하는 겁니까?”

 

태민은 그를 돌아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

 

“네. 여기서 현석 씨께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겁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노, 농담이시죠?”

 

“농담 아닙니다. 자, 어서 따라오시지요.”

 

태민은 태연한 얼굴로 폐가 안으로 들어가고, 현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뒤따라갔다.

 

‘뭔가 맛이 간 사람 같은데……. 그냥 돌아갈까? 하지만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냥 가긴 아깝고…….’

 

그는 한동안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태민이 자기에게 할 이야기가 무엇일지 궁금했기에 계속 따라가기로 했다. 그렇게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품으로 들어간 그는 곧 지하실에서 엄청난 광경에 숨을 멈췄다.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지하실에는 온갖 실험기구와 여러 동물이 갇힌 우리들로 가득찼으며, 여러 용기에서 화약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여기에 동물의 뼈다귀와 사체, 종이 더미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이건……. 이건 대체…….”

 

현석이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태민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후우……. 여전한 약품 냄새……. 고향에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군…….”

 

현석은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태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태, 태민 씨…….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인가요?”

 

태민은 씩 웃으며 답했다.

 

“제 비밀 실험실입니다.”

 

“비, 비밀 실험실이라고요? 대, 대체 어떤 실험을…….”

 

“딱 정의해서 설명드리긴 어렵습니다만, 굳히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태민은 잠시 머리카락을 손가락 하나로 배배꼬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지요.”

 

“와, 완벽한 인간이요?”

 

“그렇습니다! 강력한 신체 능력과 어떠한 질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면역력, 그리고 매우 우수한 지능을 갖춘 인간! 저는 그 인간을 창조하고자 합니다.”

 

“그, 그게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그걸 위해 지금껏 오래도록 연구했는걸요! 조만간 모든 질병이 퇴출되고 인간은 200살 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태민은 침을 튀기며 자신의 이상향을 열심히 설명하다가 현석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리고 당신이 제 모든 연구 결과를 목격한 첫번째 외부인입니다!”

 

“그,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태민은 현석의 손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제 연구 결과를 총동원하여 당신을 완전하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최초의 ‘신인류’가 되는 것이지요. 당신이라면 분명 그리 될 수 있습니다. 암! 그렇고 말고요!”

 

현석은 태민의 강렬한 눈빛에 완전히 압도당한 채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이 남자……. 단단히 미친 게 아닐까? 신인류를 창조한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리고 나더러 신인류가 되라고?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태민은 그런 그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만 믿으십시오, 현석 씨. 제가 기필코 당신을 완전하게 해드리지요…….”

 

현석은 이 순간 이 수수께끼의 남자가 위험하다고 느끼고, 도망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현장에 그대로 남는 걸 선택했다. 태민이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말을 믿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는 걸 미처 간파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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