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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약]

1화 방출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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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한 점도 없는 청명한 하늘. 그 아래에 푸르디푸른 수목이 대지를 가득 메우고, 조그마한 시냇물이 졸졸 흐르며 우뚝 솟아오른 산을 가로질렀다.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알록달록한 꽃들은 봄바람에 휘날리며 꽃가루를 사방에 흩뿌렸다.

 

이 한 폭의 풍경화같은 산 속 깊숙한 곳에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모래밭으로, 주위에 여러 기둥이 높이 솟았고, 기둥 사이에 그물망이 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서 소리지르고, “깡- 깡-“하는 쇳소리가 조용하던 산천을 흔들어댔다. 수많은 공이 날아가다가 그물망에 걸려 지상으로 떨어졌고, 수많은 차량이 모래밭에서 조금 떨어져서 줄을 서듯 대열을 맞춰 주차되어 있었다.

 

모래밭 입구에는 간판 하나가 걸렸는데, 거기엔 ‘강릉 레빗스 2군 훈련장’이라 적혀 있었다. 강릉 레빗스는 강릉의 프로야구팀으로, 10년 전 창단한 이래 리그에서 밑바닥을 헤매는 약소팀이지만,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는 구단이기도 했다.

 

이 훈련장에 모인 선수들은 프로에 처음 들어와서 적응 기간이 필요하거나, 성적이 좋지 않아 2군에 떨어진 뒤 기량을 끌어올리려 하거나, 은퇴를 앞두고 코치를 준비하면서 신인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등, 다양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한 선수가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섰다. 앳된 얼굴에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이 특징인 그는 전방의 투수를 바라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띄웠다.

 

이윽고 투수가 팔을 뒤로 젖히며 공을 던질 준비를 하자, 그는 방망이를 꽉 쥐고 타격할 태세를 갖췄다. 잠시 후 투수가 공을 힘껏 던지고, 그는 방망이를 힘차게 휘둘렀다.

 

“깡-“

 

둔탁한 타격음이 메아리 치는 가운데, 공은 하늘 높이 솟아 올라 멀리 날아가다가 그물망을 넘어 훈련장 바깥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선수들은 한동안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했. 그때 한 선수가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나이스 배팅! 또 한 건 했구나 동엽아! 이걸로 장외홈런 여섯번째구나!”

 

옆에 있는 다른 선수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힘이 얼마나 세길래 공을 치는 족족 밖으로 날려버리는 거냐? 정말이지 거물이야, 거물!”

 

또다른 선수는 팔장을 낀 채 이죽거렸다.

 

“이런, 이런……. 이러다가 우리가 막내한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할 지도 모르겠는걸? 아니, 지금 당장 해야 할려나?”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자 쑥쓰러웠는지, 그는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문을 열었다.

 

“에이, 형님들! 너무 치켜세우지 마세요. 제가 운이 좋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실전에서도 그럴 수 있을지 지켜봐야죠.”

 

이 선수는 올해 강릉 레빗스에 입단한 신인 선수 이동엽이다. 치는 족족 장외 홈런을 날릴 정도로 대단한 파워를 갖췄고, 유격수로서 수비도 잘 하는 편이라 하위권을 맴도는 구단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이렇듯 어린 나이에 탁월한 능력을 갖춰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본인은 겸손함을 잃지 않고 선배들을 잘 따라서, 고참 선수들은 그를 ‘막둥이’라고 불리며 귀여워했다.

 

그러나 구석에 서 있는 한 선수만은 싸늘한 눈초리로 동엽을 노려봤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볼 한쪽에 반창고를 붙인 그는 양주먹을 꽉 쥐고 동엽을 지켜보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저 어린 것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엽을 싸늘하게 노려보는 이 선수는 이동엽이 강릉 레빗스에 데뷔하기 전 2군 팀의 주전 유격수를 맡았던 박현석이다. 6년 전 팀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팀의 성공을 이끌 기대주였지만, 현재까지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군에 박혀 지냈다.

 

그러다 이젠 갓 데뷔한 애송이에게 자리마저 뺏기게 생겼으니, 그로서는 미칠 노릇이었으리라. 하지만 불만을 입밖에 냈다가는 후폭풍이 두려워서,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이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흰수염이 길쭉하게 난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만하면 됐다. 동엽이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 차례 나와라!”

 

이 노인은 강릉 레빗스 2군팀 감독 김정수다. 선수 시절엔 후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코치로 전환한 뒤에는 여러 팀을 전전하며 유망한 선수들의 역량을 끌어올려 크게 성공시켜서 유능한 코치라는 평판을 받는 인물이다.

 

원칙에 어긋나는 짓은 일절 하지 않고 매사에 엄격한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선수들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곤경에 처한 선수를 도와주기도 했기에, 선수들은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했다.

 

감독의 호명이 떨어지자, 현석은 타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고, 표정엔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연신 읊조렸다.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이윽고 투수가 공을 던지자, 현석은 방망이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러나 방망이는 허공을 가르고, 선수들은 이를 지켜보며 탄식했다. 그는 다시 날아오는 공을 맞히려고 방망이를 휘두르지만, 공은 제대로 맞지 않아 땅바닥을 굴러다녔다.

 

“한 번만 더! 당장! 빨리!”

 

현석은 잔뜩 열받았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투수에게 얼른 공을 던지라고 독촉했다.

 

“아, 알았으니까 진정해. 이런 걸 갖고 흥분할 필요는 없잖아?”

 

투수가 난처해하며 달래려 했지만, 현석은 버럭 소리질렀다.

 

“닥치고 어서 던져! 당장!!!”

 

투수는 빰을 삐질 흘리며 공을 던지기 위해 몸을 뒤로 젖히고, 현석은 방망이를 꽉 잡고 공이 날아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공이 날아오자, 그는 방망이를 힘차게 휘둘렀다.

 

“깡-“

 

둔탁한 타격음이 귀를 울리는 가운데, 공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현석은 공을 간절히 바라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제발 넘어가라. 제발 넘어가…….”

 

그러나 그의 기대는 곧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공이 중간에서 힘을 잃고 모래밭에 처박힌 것이다. 현석은 이걸 보고 인상을 급격히 구기다가 이내 투수에게 부탁했다.

 

“하, 한번만! 한 번만 던져줘! 이번에는 반드시…….”

 

이때 김정수 감독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이제 됐다. 다음 차례 나오도록!”

 

현석은 감독에게 애원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김정수 감독은 외면해 버렸다. 결국 현석은 고개를 떨구고 타석에서 물러나면서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젠장……. 뭔가 보여줘야 했는데…….’

 

그날 오후, 선수들은 각자의 포지션에 자리잡고 공이 날아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김정수 감독이 야구공을 높이 던진 뒤 방망이로 날렸다.

 

공은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가지만, 동엽이 도중에 몸을 던져서 글러브로 잡아냈다. 동엽은 재빨리 1루수에게 공을 던지고는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이스 캐치! 좋은 수비였다, 동엽아!”

 

“저 녀석은 홈런도 잘 치고 수비도 잘하고……. 대체 못하는 게 뭐야?”

 

“게다가 얼굴도 잘생기고 말이지. 정말이지 없던 질투심이 생길 지경이라니까?”

 

주위에서 칭찬이 쏟아지자, 동엽은 이번에도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옆 자리인 2루수 위치에 있던 현석은 부들부들 떨며 동엽을 노려봤다. 그때 공이 갑자기 그에게 날아오고, 현석은 뒤늦게 이를 인지하고 잡으려 했다.

 

그러나 야구공은 현석의 글러브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현석이 망연자실해 하고 있는 사이,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현석아, 지금 뭐하는 거냐? 이걸로 다섯 번째다! 대체 뭔 생각을 하길래 공을 계속 놓치는 거냐?”

 

현석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꼭 잡겠습니다.”

 

“죄송한 줄 알면 좀 잘해 봐! 쓸데없이 한 눈 팔지 말고!”

 

“죄송합니다, 감독님.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절대로 한 눈 팔지 않겠으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현석이 연신 사과하자, 김정수 감독은 잔뜩 찌푸러져 있던 인상을 풀고 그를 묵묵히 지켜봤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코치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이제부터는 자네가 나 대신 펑고를 해주게. 난 따로 할 일이 있네.”

 

“예, 감독님.”

 

김정수 감독은 뒤이어 현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현석아, 잠깐 나 좀 보자. 할 얘기가 있다.”

 

“예? 아, 알겠습니다…….”

 

현석은 감독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는 감독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하고 몸을 살짝 떨며 속으로 읊조렸다.

 

‘벼, 별일 아니겠지. 아닐거야……. 제발 아니어야 하는데…….’

 

이후 두 사람은 감독실에서 대면했다. 김정수 감독은 의자에 앉았고, 현석은 그 앞에 서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지 두려워했다. 얼마간 침묵이 감돈 뒤, 감독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네가 우리 팀에 입단한 지 몇년 됐지?”

 

현석은 뜻밖의 질문에 살짝 놀라며 답했다.

 

“6, 6년입니다.”

 

감독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6년이라……. 시간 참 빠르군. 넌 그 6년동안 무엇을 했지?”

 

현석은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답했다.

 

“훈련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김정수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넌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지. 하지만 아직도 우리 팀에서 자리를 못잡고 있어. 1, 2년도 아니고 6년이나 말이야.”

 

현석은 감독의 말이 자기 가슴에 못을 박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저도 어떻게든 만회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는 게 없네요. 감독님께서 그동안 배려해주신 걸 생각하면 어떻게든 자리 잡았어야 했는데…….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감독은 그런 현석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윗선에서 올해를 끝으로 너와 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

 

“예? 그 말씀은…….”

 

“그래. 내년에는 이 팀을 떠나야 할 거야.”

 

현석은 감독의 통보에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렸다.

 

‘떠나? 올해를 끝으로 여길 떠나라고?!’

 

그는 온몸을 덜덜 떨다가 감독에게 애원했다.

 

“가, 감독님……. 저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저, 전 이대로 끝날 수 없어요…….”

 

“미안하다. 윗선에서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어.”

 

현석은 바닥에 양무릎을 꿇고 양손을 싹싹 빌며 간청했다.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아시잖아요! 제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요! 이대로 쫓겨나면 어머니를 어떻게 봉양하겠어요? 그러니 제발 기회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감독은 간절히 애원하는 현석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현석은 급한 나머지 감독의 바지를 붙들며 재차 애원했다.

 

“제가 이 팀을 떠나면 갈 곳이 어디 있겠어요?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감독은 그를 외면하며 답했다.

 

“지금 당장 내쫓는 건 아니니 알아서 준비하도록 해라. 훈련은 계속 받을 수 있게 해주마.”

 

“가, 감독님……. 제발…….”

 

감독은 바지를 부여잡은 현석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현석은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흐느꼈다.

 

“제발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날 저녁, 현석은 훈련을 마친 뒤 공원 벤치에 앉아 소주를 들이켰다. 그 주변엔 소주병 여러개가 널부러져 있었다.

 

“크으~! 술맛 조타! 이러니 술을 안 마쉴 수 있나~”

 

현석은 소주를 계속 들이키며 감탄사를 늘어놨다. 그러다 술이 다 떨어지자 바닥에 내팽개쳤다.

 

“에잉~! 벌써 다 마쉈어~? 또 이슬이 만나러 가야겠구만~!”

 

행인들은 현석 주위를 지나가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현석이 발끈하여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뉘들 뭘 그렇게 봐? 구경낫숴? 내가 술 마쉬는 거 뉘둘이 보태줬어? 엉?!”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편의점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즤들이 보태주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뭐라 난뤼여~. 에잉~ 어서 이슬이 만나러 가야쥐!”

 

그때 호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현석은 취한 와중에도 전화가 온 걸 인지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휴대폰을 꺼내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응, 자기구나. 뭐? 집에 빨랑 오라구? 히힛, 싫은데~? 밖에 더 있을 건데? 뭐? 집에 빨랑 안 오면 내쫓아 버린다구~? 아이구 무서버라~! 알아쒀, 알아쒀~. 지금 당장 갈께~.”

 

현석은 전화를 끊은 뒤 연신 히죽거렸다.

 

“우리 와이프가 나를 보고 싶어 안달났구나~! 내가 장가 하난 잘 갔지. 암! 잘 갔고 말구! 히힛, 우리 예쁜 와이프 보러 가야쥐~!”

 

그 후 현석은 저녁놀이 지는 가운데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며 연신 소리질렀다.

 

“예린아, 내가 간돠~!”

 

얼마 후, 현석은 비틀거리며 집 현관에 들어섰다. 그의 아내 정예린은 술냄새를 풍기는 남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까지 어디서 술을 잔뜩 마신 거야?”

 

현석은 낄낄 웃으며 답했다.

 

“히힛~! 공원에서 소주 마셧지롱~!”

 

“이 양반아! 지금 술 마실 때야? 봐봐!!!”

 

아내는 남편의 면상에 가계부는 떡하니 들이밀었다. 거기엔 ‘붉은 글씨’가 가득했다.

 

“나간 돈 보이지? 특히 어머님 치료비가 또 올라서 이번엔 빚까지 져야 했단 말이야! 이걸 보고도 술 마실 생각이 나?”

 

현석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우웅~ 그래? 그럼 빚 갚으면 되겠네.”

 

“무슨 수로? 갚을 돈이 어딨어?”

 

“내가 이래봬도 야구선수자나~. 곧 봉급이 들어올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구~!”

 

아내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 남편을 향해 버럭 화를 냈다.

 

“봉급? 그 쥐꼬리만한 봉급? 이 화상아! 그걸론 어림도 없다고!”

 

현석은 자꾸만 자신에게 따지는 아내에게 화가 나 그녀의 손을 쳐서 가계부를 떨어뜨렸다.

 

“어쩌라고! 알아서 해! 난 이딴 거 신경 안쓸 테니까!!!”

 

아내는 손을 어루만지며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울먹거린다.

 

“당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처음 결혼했을 때 내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잘해주겠다고 했잖아. 그거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사랑하는 아내가 울먹거리자, 현석은 술이 확 깼다.

 

“아, 아니……. 우, 울 것까진 없잖아…….”

 

아내는 한 번 폭발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이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따졌다.

 

“온종일 시어머니 돌보느라 힘들었는데,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이러려고 당신과 결혼한 줄 알아? 아냐고!!!”

 

정예린은 말을 마친 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현석은 안절부절 못하며 그런 아내를 달래려 애썼다.

 

“미, 미안해 여보. 내가 잘못 했어. 다시는 이러지 않을 테니까 진정해…….”

 

그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콜록거리는 현석에게 말을걸었다.

 

“현석이 왔니……?”

 

현석은 화들짝 놀라며 응답했다.

 

“예, 어머니. 지금 막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렇구나. 네 얼굴을 보고 싶구나. 이리 가까이 오너라.”

 

현석은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어머니가 온종일 누워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곧바로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어머니의 손을 붙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오늘 하루 잘 지내셨습니까?”

 

그녀는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래. 어멈 덕분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단다.”

 

“그러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그녀는 안도해 하는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웃음기를 거두고 힘없이 말했다.

 

“얘야……. 아무래도 내가 양로원에 들어가야겠다.”

 

“예? 양로원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 때문에 너희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러자 현석은 두 눈을 부릅뜨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어머니를 모시는 게 제 낙이에요. 다시는 양로원 얘기를 꺼내지 마세요!”

 

그녀는 한 손을 힘겹게 들어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현석아……. 나에게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 충실하렴. 그게 내가 가장 바라는 소망이란다.”

 

현석은 어머니의 따스한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한동안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말을 채 떼지 못했다.

 

“어머니……. 전…….”

 

그러다가 문득 호탕하게 웃으며 큰 소리를 쳤다.

 

“하핫~! 어머니도 참! 전 잘하고 있어요. 곧 있으면 1군에 복귀해서 경기에 뛸 거라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런 아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격려했다.

 

“그래, 그러면 됐다. 네가 잘 살아간다면 난 더 바랄 게 없다.”

 

현석은 그런 어머니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지만, 내심 슬피 흐느꼈다.

 

‘어머니……. 어머니…….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날 밤, 현석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방문을 굳게 걸어잠근 뒤, 구석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6년 전만 해도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는 6년 전 성공가도를 달리던 자신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당시 대학교 야구부 선수였던 현석은 대학 야구 대회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팀을 결승전까지 올려놨다.

 

이후 열린 결승전에서 홈런 4방을 쳐 소속팀의 우승을 이끌어내고 동료들에게 행가레를 받았으며, ‘대학 야구 최고의 선수상’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수많은 팬이 그를 따라다녔고, 여러 여학생이 그와 사귀고 싶어했다.

 

졸업 후 수많은 프로야구팀이 몰려들어 계약을 제의했는데, 현석은 자기 고향 팀인 강릉 레빗스와 억대 계약금을 체결했다. 그는 레빗스 관계자와 악수를 나눈 뒤, 강릉 레빗스 입단 기자회견에 서서 기자들 앞에서 자기 포부를 당당하게 밝혔다.

 

“지금까지 하위권을 맴돌았던 강릉 레빗스의 부활, 제가 이끌어보겠습니다. 반드시 팬들께 영원히 기억될 최고의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건만, 이제는 모든 걸 잃어버렸다. 그가 위대한 선수가 될 재목이 될 거라 칭송하던 이들은 모두 돌아섰고, 팬들은 연기처럼 사라졌으며, 팀은 냉정하게 방출 통보를 내렸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현석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당시에는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든 팀을 떠나 무일푼으로 지내게 되다니……. 이대로 쫓겨나 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지금까지 야구에만 몰두해서 그 외에 잘하는 건 딱히 없는데……. 대체 어쩌면 좋을까? 어찌하면…….’

 

그렇게 한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그 정체를 눈치챘다.

 

“뭐지……? 인형?”

 

그가 집어들어보니,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수염난 인형이었다. 그는 곧 그 인형이 마법사라는 걸 눈치채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마법이라……. 너같은 마법사를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런 바보같은 고민 따윈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그가 무심코 내뱉었던 그 말은 곧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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