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크기 조절기능 사용 안내

일부 안드로이드 기종의 경우 폰트크기 조절기능 사용시
정상작동이 안되는 오류가 발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스마트폰의 기본 글씨 크기를
조정하여 주시면
정상적으로 폰트크기조절
기능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스마트폰 설정 방법

설정 → 디스플레이 → 글자 크기 및 글꼴

닫기

[심해어]

지구(上)

가(21)

줄 간격(1.8)

자간(0)

| |

<언월력 산달 7일.>

더 자주 어지럽다. 시야가 답답하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많다.

팔을 들어올리기가 어렵고 배가 자주 아프다.

 

<언월력 산달 13일.>

멍이 손목까지 내려왔다. 왼쪽 눈이 멀어버린 것 같다.

검은 면사포를 길게 늘어뜨리는 날이 많아졌다.

 

<언월력 산달 15일.>

버러지 같은 놈 하나가 달려들었다. 엉망이 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란에게 들켰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려는 것을 내치고 돌아왔다.

 

<언월력 산달 16일.>

그 버러지가 이제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한다.

 

 

“유! 얼굴 꼴이 말이 아니군. 무슨 일 있었는가?”

“흥. 조막만한 계집애 때문이네. 주제를 모르고 말이야. 좀 예뻐해주려 했더니 내 얼굴을 이 꼴로 만들어놨네.”

“한심한 놈일세. 못 당해낼 것 같으면 달려들지를 말았어야지!”

“못 당해낸 것이 아니야! 당황을 했을 뿐이네. 내 오늘은 꼭,”

 

“오늘은 꼭 무엇을 하신단 말입니까?”

 

번듯하게 생겨선 희롱을 일삼던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면 뒤를 돌아본 곳에는 녹빛의 면사포를 드리운 그레이스가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뭐, 뭘 말이냐!”

“공작께서 계획하시던 일 말입니다.”

 

유 헤먼 공작이 말을 더듬어가면서 맞받아치는 것을 가볍게 무시한 그레이스가 구두 소리를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재밌는 일입니까? 저도 좀 알고 싶은데요.”

“뭐라는 것이냐, 이 계집...!”

“아.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듣기론 오래도록 제 방문을 서성이셨다던데, 제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드셨습니까?”

“...”

 

사람들이 점점 몰려든다. 이런 때에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외부인이자 낮은 신분인 여인을 탐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자신은 헌신짝 신세가 될 것임을 공작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예, 예를 갖추거라.”

 

긴장을 한 탓인지 목소리도 말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녹빛 면사포 너머로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을 짓는 그레이스에 유 공작의 옆에서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던 하이든 공작은 섬뜩함을 느꼈다. 유를 보고 있는 건지, 그 너머의 군중들을 보고있는 건지, 그도 아니면 또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미묘한 웃음 속에 비틀린 살기가 느껴진 탓이기도 했다. 기사단원인 하이든은 비록 말단 기사이기는 해도 수차례 전장에 뛰어든 경험이 있으며 살의를 감지할 줄 아는 자였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이 여자는 유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죽여버릴 수도 있는 자다.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 이만 가지. 더 이상 이 여인에게 관심도 끊게.”

“?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이야...?”

“하지 말라면 하지 말게. 오늘도 보게. 자네는 말리기만 할 거야.”

그레이스가 이번에는 좀 더 크게 웃었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것이 괴담 속 처녀귀신 같은 느낌까지 든다.

두 공작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그레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다 알고 있어. 네가 뭘 하는지, 뭘 먹고 어떤 말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다 안다고. 처신 잘해.”

“미친겐가...?”

“쉿. 가자고.”

 

하이든은 유를 다독여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저 멀리서 지켜보며 수군대는 공작과 백작 부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레이스만이 남아 서 있었다.

 

“....X같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은 욕을 뇌까리며 뒤돌아서는 그레이스의 눈이 조금 빛난다.

 

 

그들은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있었다.

“착륙지점은 좌표 안 찍으신건가요.”

“찍었습니다만, 이게, 왜..”

란은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레이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음에 안 드시면 직접 하시던가요.”

퉁명스러운 말을 하며 란은 앞장서서 고속도로를 횡단했다.

도로에는 자동차도, 사람도 없었다. 인적 드문 시골보다 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뭐죠?”

“보시면 알 겁니다.”

그레이스는 다시 한 번 란을 노려본다. 그냥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들은 고속도로를 넘어 덤불과 기다란 나무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이럴거면 숲 한가운데로 좌표를,”

“떨어져 걸으십시오.”

그레이스의 말을 싹둑 잘라먹은 란은 궁시렁대며 더 빠르게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길이나 잃지 마세요. 당신 잃어버리면 어차피 내가 찾으러 와야하는데.”

“......”

“?”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그레이스는 없고 썰렁한 바람만 나뒹굴었다.

 

“.....하....”

 

 

“무슨....”

뭔가 이상했다. 고속도로인데 사람이 없는 것부터가 이상하긴 했지만 이곳은 더 이상했다.

사람들이 칼이나 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다. 죽이고 죽이면서, 피가 튀기고 살이 찢기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이런 세상이었던 것처럼.

-!

“아..!”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뒤에서 달려나오며 그레이스를 툭 치고 지나간다. 넘어질 뻔하긴 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섰을 때,

-!

또다시 누군가 그레이스를 밀어 넘어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레이스는 치맛바람으로 넘어진 채 멍하니 싸우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지금 이곳에서는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밖에는 선택할 수 없었고 그레이스는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그레이스는 싸우는 자들을 피해 구석 골목길 쪽으로 뛰었다.

골목길에는 어미가 갓난아이를 안고 허기를 달래거나,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아이들이 구걸을 하며 돌아다녔다.

 

“왜, 왜 이러고 계세요..?”

돈이 없어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옷감도 나쁘지 않았고, 며칠 못 씻어 꾀죄죄하구나 하는 느낌 외에는 노숙자가 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갓난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그레이스를 올려다보며 푸석푸석한 입술을 달싹인다.

“예...?”

“-라고...”

“뭐라고, 지금...”

“도망치라고....”

 

여인은 손가락으로 담벼락 너머의 학살 현장을 가리키며 너도 봤지 않느냐,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레이스는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일었다. 이런 상황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랬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자신의 소매 안에서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절반으로 나누고 여인에게 건넸다.

“제가 드릴 수 있는게 이거밖에 없어요. 이걸로 뭐든 하세요. 적지는 않은 돈이에요.”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가, 어려보이는데 이런 곳에서 험한 꼴 당하지 말고 올라가렴.”

“...어디로...?”

“저 위쪽은 이렇지 않을거야... 그 곳은 안전할거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다시금 자신의 아이를 소중히 끌어안고 앞뒤로 몸을 흔드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이 세계의 당연한 순리입니다.”

굽이진 골목길 끝에서 두건을 푹 눌러쓰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불쑥 등장해 말을 걸어왔다.

그레이스의 눈에 강한 경계심이 보이자 여자는 모자를 천천히 벗고 자신을 소개했다.

“드디어 뵙네요. 유지현님. 아, 그레이스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에 흩날려 싱그럽게 웃는 입꼬리와 조화를 이룬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작가 코멘트

점점 재미가 없어지는군요,,
다음화 보기

신고

신고사유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 0 / 250

도장
완료